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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조선의 국모 명성황후

리키마루 2017. 8. 14. 20:04

명성황후(1851~1895)는 조선/대한제국 고종의 정비이자 조선의 마지막 군주 순종의 어머니이다. 일본인들에게 살해당하는 사건인 을미사변으로 인해 조선사 뿐만 아니라 한국사 전체에서 가장유명한 왕비라고 할수 있겠다. 본명은 민자영 혹은 민아영으로추정된다.




민아영은 1851년 음력 9월 25일 자시(밤11시~오전1시)에 경기도 여주 근동면 섬락리에서 태어난다. 아버지는 민치록과, 어머니는 이씨이다. 원래 두 사람 사이에는 1남 3녀가 태어났지만, 모두 어린 나이에 죽고 민아영 혼자 남았다. 어린 시절은 유복한 집안 덕에 그럭저럭 살았지만, 1858년 아버지 민치록이 세상을 뜨게 된다.흔히 민아영이 고아로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알고 있지만, 일단 어머니 이씨는 살아서 딸이 왕비가 되는 것도 보았고, 무엇보다 민치록의 집안은 결코 가난한 집안이 아니었다. 민아영의 할아버지 민기현은 예조참판을 했었고, 아버지 민치록은 과거도 치르지 않고 문음으로 관직을 할 수 있을 정도의 명문가였고, 죽기 마지막에는 사도시에서 종 4품인 첨적직을 맡는 등 세도가문까지는 아니었지만 고위층 집안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인현왕후의 종가집이다.명성황후의 본명을 두고 논란이 있다. 우선 "자영"은 줄리에트 모리오의 운현궁, 정비석이 쓴 "소설 민비" 등에서 나온 작명이라는 것이다.  다른 이름으로 유력한 것은 아영으로 학술자료의 기본이 되는 열성왕비세보 열성황후왕비세보(列聖王妃世譜列聖皇后王妃世譜)에는 아영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여흥민씨 집안에서는 입에서 입으로 전하다보니 변경된 것으로 본다고 '자영'을 미는 중. 그 외에 아명은 당시 항렬을 따라서 정호였다는 말도 있으나, 여자의 경우는 남자와 다른 항렬자를 사용한 예도 있어서 확실한 증거가 없다. 본명이 자영이라고 사전에 등록된 경우는 많지만, 정식사료가 아영인 것으로 봐서는 별도의 학술적 근거보다는 여흥 민씨 쪽 족보에 따른 것으로 추정 중이라고 한다.

명성황후는 어릴 적부터 아버지 민치록으로부터 학문을 배웠는데, 《소학》(小學)·《효경》(孝經)·《여훈》(女訓) 등을 즐겨 읽었고, 특히 역사를 좋아하여 치란과 국가의 전고에 밝았다고 한다. 오늘날 그녀의 공부방 자리에는 명성황후 탄강 구리비(明成皇后誕降舊里碑)(생가 입구 오른쪽)가 세워져 있다. 9세 때인 1858년 아버지 민치록이 죽자 습렴하는 모습을 어른처럼 지켜보아 주위 사람을 놀라웁게 했다. 김동인의 역사소설 《운현궁의 봄》에서도 명성황후는 부친 민치록이 으로 자리에 누웠을때에 간호를 한 효녀로 묘사되고 있다.

아버지가 죽은 뒤 섬락리 사저에서 한양 감고당으로 옮겨 홀어머니와 함께 지냈다. 감고당은 인현왕후의 사가로서 민치록의 소유였으며, 이름은 영조가 하사했다. 형제와 부모를 여읜고아인 데다가 의지할 오라비도 없었다. 그러나 이후 가까운 친척들의 도움을 받으면서 성장했다.

1866년 어린 민자영은 왕비 간택에 참여하게 된다. 민자영이 간택되어 왕비가 되는 과정은 《동치오년병인삼월 가례도감의궤》(同治五年丙寅三月嘉禮都監儀軌) 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우선 1866년 음력 1월 1일 대왕대비 조씨가 조선에 있는 12세 ~ 17세 사이의 모든 처녀들에게 금혼령을 내린다. 그리고 음력 2월 25일 초간택을 행하였고, 김우근의 딸, 조면호의 딸, 서상조의 딸, 유초환의 딸 등과 더불어 재간택에 들어갔다. 왕비로 정해진 때는 3월 6일의 삼간택에 뽑힐 때였으며, 3월 21일 남편이 될 고종이 운현궁에서 명성황후를 데리고 창덕궁으로 돌아오는 친영(親迎)을 거행했다.  아버지 민치록은 왕의 장인에게 추증하는 예에 따라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에 추증되었고, 아버지의 본부인 해주오씨는 해령부부인에 추증되었으며, 생모 감고당 한산이씨는 한창부부인의 작위를 받았다. 이어 민치록에게는 예전에 따라 여성부원군에 추봉되었다.

흥선대원군이 고종의 아내로 명성황후를 선택한 의도가 약간 달랐을 거라고 보는 학자들도 있다. 위에서 언급한 대로 여흥 민씨 집안은 세도가문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 명문가였기에 순수하게 외척 견제용으로 보기는 어렵다. 실제로 여흥 민씨는 결혼 이전부터 흥선대원군과 어느 정도 관계를 맺고 있었는데, 명성황후의 양오빠 민승호는 흥선대원군의 부인 부대부인 민씨의 친남동생이다. 흥선대원군과는 자형과 처남 사이. 그리고 흥선대원군의 어머니 역시 여흥 민씨 집안 사람이기 때문에, 명성황후는 흥선대원군과도 먼 친척 관계가 된다. 그래서 대원군은 직접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집안을 외척으로 맞아들어, 외척의 발호를 막으면서 동시에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려고 했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명성황후는 비록 흥선대원군이 간택한 며느리였지만 시간이 갈수록 틀어져 나중에는 결국 견원지간이 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그 원인을 두고 여러가지 설이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완화군과 관련된 설이다. 고종이 친정을 시작하기 직전인 1871년 11월 4일 명성황후는 첫 아들을 낳는데. 이 아이는 항문이 없이 태어나 결국 4일 뒤인 11월 8일에 죽는 일이 벌어졌다(출처 승정원일기 1871년 11월 8일 기사), 이 때문에 흥선대원군이 이전에 고종과 궁인 이씨에서 태어난 완화군을 원자로 책봉하려 시도했고 이때부터 명성황후와 흥선대원군의 사이가 벌어졌다는 주장이 있다. 여기에 덧붙는 야사에 따르면 흥선대원군은 명성황후의 아들이 건강이 좋지 않다는 소식을 듣자, 아기의 건강 회복을 위해 산삼을 달여 먹도록 지시했는데, 달인 산삼을 먹은 민씨의 아들은 얼마 후에 급사했고 명성황후는 이를 흥선 대원군이 완화군을 세자로 만들기 위해 고의적으로 아기를 살해한 것이라 주장, 흥선 대원군에게 적개심을 불태우게 되었다고 한다.
다만 위 주장은 근거가 부족한게 일단 죽은 명성황후의 아이는 대원군이 독살한 것이 아니라 항문이 막혀서 죽었고, 완화군 이야기도 자손이 귀해진 조선왕실 입장에서는 고종의 첫 아이기이자 귀한 손자이기 때문에 할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이 유난히 완화군을 귀여워한 건 당연한 일이다. 거기에 왕권 강화을 하려던 대원군의 입장에서 후대 왕의 권위에 문제를 줄 수 있는 서자를 성급하게 왕세자로 책봉해야할 하등의 근거가 없고, 당시 고종이 아직 20도 안된 나이 인 것을 생각해보면 서자를 급히 원자로 책봉하는 것은 명분은 물론 상식적으로도 맞지 않는 일이다.
각설하고 아기가 죽은 후 흥선 대원군의 정책에 본격적으로 반대 노선에 나선 명성황후는 흥선 대원군에 맞서기 위해 자신의 친척들을 불러 모아 정치 세력화 하였고, 고종을 부추겨 흥선 대원군과 고종의 공동 정치 체제를 부정하는 친정 선언에도 어느 정도 개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만 당시 명성황후의 개입이 어디까지었냐는 것엔 논란이 많다. 주로 알려진 야사에선 명성황후가 고종을 조종하다시피 부렸다고 말하며, 명성황후의 막후통치설을 주장한다.
일본인들에 의해 기록된 자료에는 위의 이야기와 달리, 내정에 지나치게 개입하는 흥선대원군에 대한 컴플렉스를 느낀 고종이 자발적으로 움직였고 이 과정에서 민씨의 파벌을 키우는데 이바지했다고 나와 있다. 실제로 대원군 실각 이후의 실제 대립은 명성황후와 대원군이 아니라 고종과 대원군을 중심으로 문제가 커졌기에 야사에서의 이야기보다 이쪽이 더 가능성이 높다.
다만, 이 와중에 명성황후와 대원군의 대립에 관한 소문 등이 널리 퍼진 것은 확실하고 이를 바탕으로 을미사변 시기 대원군이 동원되기도 하지만, 이 문제 자체도 대원군이 낚인 것에 가깝지, 주도했기는커녕 보조한 흔적도 없다. 차라리 대원군과 명성황후가 인척관계 외 다른 연결고리가 있었으나 그 고리가 끊어지게 되면서 소원해졌다거나, 고종과 대원군의 사이가 벌어지고 고종의 처가인 민씨 일파의 세력이 커지면서 고종의 아내인 명성황후 역시 대원군과의 사이가 소원해졌다는 해석이 신빙성이 높다.
또한, 이 둘의 대립이 심했다는 이야기는 원래 일본의 기록에서 나온 것이 야사로 발전했다는 추측도 있다. 이렇게 추측하는 학자들은 실제로는 그 정도까지 사이가 나쁜 건 아니었는데, 일본이 명성황후의 평판을 떨어뜨리려고 과장해서 퍼뜨린 이야기라고 본다.



                                                                                 흥선대원군 이하응


고종과 명성황후는 대원군이 꼼짝할 수 없도록 자신들의 세력을 서서히 형성하여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였다. 또한, 외세에 대한 정치적 입장이나 경복궁 중건 등으로 인한 대원군의 거듭된 실정이 왕의 친정이라는 시대적 요구를 증폭시키고 있었기에 이를 적극 이용하였다. 마침내 1873년 고종과 명성황후는 최익현이 대원군의 실정과 정책을 비판하는 상소를 올리게 하여 이를 계기로 고종 친정을 선포함으로써 대원군을 권력의 중심에서 축출했다.

고종은 친정 직후 대원군 집권 시의 쇄국을 풀고 일본과 수교하였고 이후 차례로 서양의 열강들과 수교를 맺어나갔다. 그러나 이전의 강력한 통상수교거부정책(쇄국정책)으로 미처 외세에 대해 준비가 되지 못한 상태에서 이루어진 개방은 여러 가지 문제점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개국 이후 내적으로는 여전히 남아 있는 대원군과의 대립과 기존 세력과의 갈등, 외적으로는 조선의 국권을 침탈하고자 하는 일본과 서구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고종과 명성황후는 여러 가지 시행착오를 하면서 외줄타기를 하듯 위태로운 상황에서 정국을 운영하였다.

그 와중에 1882년 신식군대에 대한 구식군대의 불만이 표출된 임오군란이 터지고 명성황후가 힘을 기르기 위해 키웠던 민씨 세력이 위협 당하자. 명성황후마저도 그 신변의 안전을 도모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명성황후는 궁궐을 탈출하여 장호원에 은거하였고 임오군란을 계기로 일시적으로 정권을 되찾은 대원군은 명성황후가 죽었다고 선포하고 국장까지 치르려고 하였다. 이때 명성황후는 고종에게 자신이 건재함을 알리고 청나라에 지원을 요청하도록 하였다. 청나라 군대의 출동으로 대원군은 청으로 압송되었고 명성황후는 궁궐로 돌아왔다. 그리고 이때부터 더욱 자신의 안전을 위해 민씨들의 힘을 모으는 다소 파행적인 정국 운영을 해나가기 시작하였다.

1884년에는 청의 개입으로 더뎌진 개화에 불만을 품은 개화파들이 일으킨 갑신정변으로 왕권이 위협받자 명성황후는 더욱 청나라와 가까이하게 되었고 이후 더 적극적으로 정치에 관여하기 시작했다. 신하들과 아버지(대원군)에게조차 권력에 도전을 받은 고종은 명성황후와 더욱 밀착되었고 모든 국정을 그녀와 의논하였다. 특히 외교적인 문제는 명성황후와 거의 뜻을 같이하였다고도 할 수 있다. 이전에는 사리판단이 비교적 명확했던 명성황후였지만 목숨마저 위협받은 환란을 겪은 후 그녀는 권력에 대해 지나치게 강렬한 집착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와 더불어 궁궐에서 굿을 하거나 명산대천을 찾아다니며 치성을 하는 등 국고를 낭비하는 비이성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다.

명성황후에 대한 외국 측의 기록을 보면 하나같이 그녀가 가냘프지만 영민하고 총명하며 나라를 위해 노심초사하는 여인이었다고 쓰여있다.

19세기 말 한국을 다녀간 영국의 비숍 여사는 명성황후를 알현한 후 그녀에 대해 이렇게 기록했다.

왕후는 가냘프고 미인이었다. ... 눈은 차고 날카로워서 훌륭한 지성의 소유자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명석하고 야심적이며 책략에도 능할 뿐 아니라 매우 매혹적이고 여러 가지 면에서 매우 사랑스러운 여인이었다.

선교사 언더우드의 부인은 명성황후에 대해 또 이렇게 말했다.

그녀의 지식은 주로 중국에서 얻은 것이었지만 세계 강대국과 그 정부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나에게 많은 질문을 던졌고 자기가 들은 것을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 그녀는 섬세한 감각을 가진 유능한 외교관이었고 반대세력의 허를 찌르는 데 능했다. ... 그녀는 일본을 반대했고 애국적이었으며 조선의 이익을 위해 몸을 바치고 있었다. ... 그녀는 아시아의 그 어떤 왕후보다도 그 수준을 훨씬 뛰어넘는 여인이었다.

명성황후를 시해한 일본 낭인들조차도 그녀를 동양의 호걸, 여장부로 평가했다. 지나치게 총명하고 정치에 적극적이었기에, 또 보기에 따라서는 시대를 앞선 매우 현대적인 자존감을 가진 여인이었기에 명성황후는 정적들의 표적이 되었고 신변은 늘 불안했다.

그리고 마침내 1894년 동학농민전쟁, 청일전쟁을 거치면서 조선정치에 깊이 개입하고 들어온 일본을 외교적으로 러시아를 동원하여 조선에서 축출하고자 했던 명성황후의 계획을 무너뜨리기 위해 일본은 후안무치한 음모를 세우기에 이르렀다. 그것은 일명 ‘여우사냥’으로 불린 명성황후의 시해시도였다. 일본은 자신들이 조선의 국권을 침탈하는 데 가장 방해요소로 왕비였던 명성황후를 지목하고 제거하고자 하였다.

1895년 음력 8월 20일 새벽, 경복궁 안에 있는 건청궁의 옥호루에서 명성황후는 난입해 들어온 일본 낭인들의 손에 처참하게 시해당했다. 시신마저 향원정의 녹원에서 불살라지는 수모를 당했다. 이것이 바로 을미사변(명성황후시해사건)이다. 이 을미사변을 지휘한 것은 일본 정부의 지시를 받은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였다.

외세에 의한 왕비살해는 국내뿐만 아니라 국외적으로도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국내에서는 일본에 왕비 살해의 원한을 갚자는 움직임이 일어나면서 을미의병이 일어났고 국제적으로는 일본을 비난하는 목소리가 드높아졌다. 시아버지였던 대원군은 이 틈에 잠시 정권을 되찾는 듯하였지만, 고종이 이미 아버지마저 믿을 수 없는 상황에서 러시아 공관에 안전을 의탁하는 아관파천을 행함으로써 곧 실각하였다. 명성황후의 시해 사건으로 인해 조선은 국격을 훼손당하고 망국으로 가는 길을 한발 더 내딛게 되었다.

명성황후는 시해 직후 대원군에 의해 폐위되어 서인으로 강등되었다가 같은 해 고종에 의해 복호되었고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로 즉위하면서 명성이라는 시호가 내려지고 황후로 추봉되었다. 장례는 죽은 지 2년 만인 1897년에 가서야 국장으로 치러졌으며 홍릉에 안장되었다. 요절한 두 아들 다음에 낳은 셋째 아들이 마지막 임금 순종황제이다.

명성황후에 대한 평가는 살해 직후부터 오늘날까지 여러 가지로 엇갈린다. 그녀가 망국의 왕비로서 나라를 망치게한 장본인이라는 평가부터 구국을 위해 몸을 바친 시대의 여걸이었다는 평가까지 참으로 극단적으로 다양하다. 이것은 아마도 19세기 말 시대적 혼란 상황 속에서 그녀가 보여준 정국운영의 다양한 면 때문일 것으로 보인다.

대원군의 쇄국 정치에 반대하여 미처 준비도 안 된 상황에서 나라를 열었지만 급진적 개혁은 원하지 않아 개화파의 불만을 샀고, 일본을 물리치려고 외세를 끌어들였으며 그녀의 친정이 새로운 외척 세력으로 급부상하는 등시대를 역행했다는 것이 주요한 비판의 이유였다. 한편에서는, 똑같은 그녀의 정치적 행보에 대해, 명성황후가 지나친 쇄국과 급진적 개혁 사이에서 중심을 잡고자 노력했고, 열강들을 이용해 나라의 독립을 유지하는 외교술을 펼쳤으며, 그녀가 의도적으로 키운 외척들이 훗날 고종의 측근이 되어 고종이 대한제국이라는 마지막 시도를 해볼 수 있게 했고 이것이 독립운동과 이어졌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기도 한다. (출처: 인물 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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